세최
롤로노아 조로
원피스
#1f57ff
살아오며 바다라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적은 없었다. 어딘가를 여행하는 취미는 오래전부터 없었을 뿐더러, 굳이 먼 길을 떠나 바다를 보러가고 싶다는 충동이 생길 정도로 바다나 그 너머의 무언가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살아가며 하는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시간은 모자랐고, 할 일은 많았고, 여유는 없고. 감성조차도 메마른지 오래일 뿐더러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라고는 시간에 쫓겨 뜀박질하고 있는 자신 뿐이었는데, 대체 무엇을 하냔 말이다. 그래, 그런 내가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바다로 향하는 이 자동차에 자신의 몸을 끼워놓고 어째서 몇 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차창 너머로 수많은 나무가 스쳐 지나가고, 차들이 보이고, 활자가 몇몇 보인다. 그것들을 보며 시즈 카르페는 깊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스쳐지나가는 나무가 하나 둘 늘어갈 수록 바다는 가까워진다. 그것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젠장, 빌어먹을, 젠자아아아앙……….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한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 목구멍을 간질이다가 사라져간다. 창문에 열이 오른 이마를 기대면, 욱신거리는 두통이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야, 왜 그렇게 울상이야? 일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놀러 가는 건데."
"그래, 놀러 가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미쳤어? 왜 바다까지 가? 시간이 남아돌아?"
"말뽄새 하고는…… 이왕 놀러 가는 거 멀리 가야지. 바다, 좋잖아?"
"좋겠냐? 너나 좋겠지요, 너나 좋겠지!"
"이 놈은 형한테 너는 무슨. 너도 동의했잖아, 온다며. 이미 정한지도 출발한지도 오래인데 왜 이제와서 난리야? 이럴 거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자식아."
나도 몰라. 답지 않게 ―누군가는 원래의 너랑 똑같다고 말하겠지만―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앞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 대답한다면 저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져서는 짜증날 정도로 웃음을 연신 내뱉어댈 것이 뻔해서 차마 입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야, 카르페가 그런 감성 타는 소리도 하고, 다 컸네! 그런 소리를 듣고도 자신보다도 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사람의 머리통을 내리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도 하고.
지이이잉…. 짧은 소리와 함께 차창이 내려가며, 바람이 휘날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불청객과 같은 바람결에 저도 모르게 툭 짜증이 튀어나온다. 뭐하는 거야, 갑자기? 바람이나 맞으면서 머리 좀 식혀. 이제 다 왔다. 저기 봐, 저기. 바다도 보이네.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심지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 왔다는 소리가 거짓은 아닌지, 말 그대로 저 멀리 한 구석에 바다의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푸른 빛의 드넓은 바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던 바다. 모든 것의 고향이라던 바다. 카르페는 멍하니 저 편의 바다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질이고 머리카락을 흔들여놓았다.
바다다. 그토록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대던 바다로 왔다.
내가 왔다, 내가… 내가……….
내가, 돌아왔다. 바다로.
………뭐? 뭘 돌아와?
바다의 노래
시즈 카르페 & 롤로노아 조로
* 환생 및 현대 AU
카르페는 멍하니 눈 앞의 것을 바라봤다. 뭐랄까, 저 멀리서 바다를 보고 있을 때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가슴인지 마음인지 모를 것을 마구 흔들어댔는데, 막상 바다 앞에 서있자니 별 다른 감정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 앞의 저것은 바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갑작스레 후회가 들이닥친다. 스물 둘라는 나이로 바다에 기쁨을 느끼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비집고 들어와 발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모래 같은 것은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주제에 그 감각이 생각보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 카르페! 바다 안 들어갈 거냐?"
"나 수영 못 하는 거 알잖아."
"튜브 빌릴 수 있는데."
"아 씨, 싫어………"
"까탈스럽기는."
바다가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풍덩, 인영 하나가 바다에 빠진다. 저 형은 어쩌다가 저렇게 바다를 좋아하게 된 건지. 전생에 무슨 바다에서 살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니… 애초에 바다 생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펭귄이라던가, 범고래라던가, 많잖아. 근데 저 형은, 뭐랄까…… 고래가 어울리긴 했다. 혹등고래. 바다 끄트머리에서 백색의 머리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그 행위를 반복한다. 나는 모래사장 한 구석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는 그 꼴을 가만 구경이나 해댔다.
바다의 부름이라던지, 바다의 이끌림이라던지, 바다에 홀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몇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카르페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웬 되도 않는 헛소리질들이야.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 무엇도 담기지 않았다. 카르페는 눈이 부신 푸른 색의 바다도 달갑지 않았고, 저 깊은 곳의 짙은 푸른 색도 달갑지 않았다. 카르페는 물에 잠기는 것이 싫었다. 이는 그저 자신이 맥주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어째서인지 모르게 바다에 발을 들이면 이상한 감각이 뒤따랐다. 어떠한 충동. 어떠한 열망. 어떠한, 뭐 그런 것들.
그게 카르페가 바다와 마주하자마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뒷걸음질을 선택한 이유였다. 수평선의 바다는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았다.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거야. 대체 뭘 말했던 거야. 질문을 덧붙여도 바다는 아무 말 없었다. 자신의 말 따위는 그저 자신의 위장속으로 삼켜 소화라도 해댄 듯한 태도로 느껴져, 카르페는 거대한 바다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자신보다도 더 드넓고 많은 것을 품어낼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휴가니 뭐니 즐기러 와서는 더 똥 씹은 기분이나 되어서는."
몰려오는 한심함을 어찌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드넓은 모래사장 사이에서 카르페는 몸을 뒤로 뉘이고 멍하니 파라솔의 안쪽을 바라봤다. 쨍한 여름의 공기, 습도, 타오르는 듯한 열기. 어쩜 이리 나열하면 나열할 수록 기분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내려는 의지 조차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는 소리였다. 귓가에서 울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야깃소리. 뭐가 그리도 좋은지 행복이 가득한 공간에서 카르페는 홀로 먹먹한 감상을 내뱉어내고 있었다.
꿈의 장소 바다. 사랑이 넘치는 바다. 낭만이 넘치는 바다. 이 정도면 그냥 모든 것들을 바다에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닌가? 바다는 그저 원래 자신의 형상도 의미도 잃어버린채 타인들이 제멋대로 붙인 것들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본래 바다를 칭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누워있으니 별 소리를 다 한다. 눈을 감으면 바다의 파도 소리와 함께 이전부터 이어지던 사람의 목소리 따위가 뒷따른다.
"이럴 수가… 아이스크림 좀 사려고 보냈더니만 대체 몇 분이 걸리는 거야! 정말, 결국 사오라고 했던 아이스크림도 죄다 녹아버렸잖아……."
"날 혼자 보낸 니들 잘못이지."
"부정할 수는 없는데, 그 당당한 태도를 좀 어떻게 해볼래?!"
"대체 어쩌다가 이런 길치가 태어난 걸까…"
"니들이 길을 잘못 알려줬잖아."
"제대로 알려줬다고, 바보 마리모!"
"그만! 상디도, 조로도, 그만 싸워."
"흥."
"네~엥, 나미 씨이이이."
소리가 거슬렸다. 그래, 마리모니, 상디니, 조로니, 나미니 주절 거리는 목소리가……….
조로, 조로……… 조로.
왜 이리 익숙한 느낌이 들지? 조로라는 이름이 듣기 쉬운 이름이었던가? 사람들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었던가? 아니,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십이년이라는 기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참으로 생소하고, 어디에서 잘못 들을 일조차도 없을 정도의 이름. 헌데, 가슴 깊숙해서 올라오는 것은 익숙함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익숙한게. 조로, ……조로, 조로…………….
……롤로노아?
벌떡, 몸을 일으킨다. 보이는 것은 모래사장이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초록색의 무언가를 찾는다. 그 이름과 초록색의 연관성 따위 하나도 알 수가 없었지만, 자연스레 제 본능과 정신이 이끄는 대로 초록색의 그것을 찾기 위해서 연신 머리를 까딱이고 눈동자를 움직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생소한 초록색이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한참을 둘러봐도 초록색의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괜시리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쿵쿵 대는 듯한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난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는 거지? 야, 누군지 뭔지도 모르는 사람 찾아내서 뭐하려고. 애초에 롤로노아 같은 이름이 그 사람의 이름이 맞긴 한 거냐? 그걸 떠나서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모르면서 왜 이러는 거냐. 그래, 더위. 더위라도 잘못 먹은 게 틀림없었다. 지독한 여름 바다의 더위를 잘못 먹어서 제대로 된 사고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 발을 멈춰야할 거 아니야. 야. 어이. 카르페. 시즈 카르페! 정신 좀 차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자연스럽게 손이 오른쪽 눈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고통에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 마치, 눈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흉터라도 하나 생긴듯 고통이 일었다.
"……어, 야? 야, 왜 그래, 카르페?"
"젠장………."
"카르페, 야. 정신 좀 차려봐! 왜 이래?"
"젠장, 젠장, 젠장…………!"
"………르페!"
기우뚱 넘어가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보였던 것도 같았다. 초록색의 그것. 더위를 너무나도 많이 먹은 게 틀림 없었다. 아니면 빌어먹게 현실감 넘치는 악몽의 연속이던가. 필시 그럴 것이었다. 그랬어야만 했다.
"흠? 조로, 뒤에 뭐라도 있어?"
"………아니, 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착각 아니야?"
"그런가……"
***
익숙한 꿈을 꿨다. 드넓은 바다 위에 나는 서있었고, 그 놈도 같이 서있었다. 긴 항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고, 많은 사건들과 조우했었다. 언젠가의 순간에는 걱정 없이 웃기도 했고, 깊은 분노를 느끼는 때도 있었고, 쉴새없이 눈물을 흘려 보내는 순간도 있었다. 누군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어내는 순간이 있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거나 베어지기도 했다. 눈을 뜨고 눈을 감고, 그 모든 날들의 반복. 그런 날들 속에서는 언제나 옆자리 한 구석에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질리도록 본 얼굴. 입에 담으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존재.
롤로노아………
"……조로."
"카르페?"
"………형?"
눈을 뜨면 그것은 모래사장이나 바다 같은 것이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침대 위였다. 욱신거리던 눈두덩이의 고통도 이제는 사라진 듯 싶었다. 몸을 일으키면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다. 야, 너 아까 그대로 쓰러졌잖아. 그 정도로 바다가 오기 싫었던 거냐? 그럼 좀 말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바다나 들어갔다가 나오고, 사람이랑 대화나 하고. 평소와 같이 가볍게 흐르는 목소리이지만 카르페는 저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있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아주 잘 알았다. 카르페는 고개를 저으며 주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금 몇 시야? 지금 열한 시 좀 넘었어. 나 몇 시간이나 쓰러져 있었던 거야? 한 아홉 시간 정도 됐나. 오래도 쓰러졌네. 그래, 난 죽은 줄 알았다. 이 자식아. 평소와 같이 문답 형식으로 대화가 지나간다. 욱신거리는 머리 탓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도 아까의 꿈인지 모를 것이 머리에 떠돌아다녔다.
"⋯너 괜찮은 거 맞아?"
"멀쩡해."
"예, 어련하시겠어요⋯⋯. 오늘 하루만 자고 내일 바로 돌아갈 거야. 바다에서 뭘 하기도 좀 그렇고, 이제는."
"뭐? 괜찮다니까."
"됐어, 됐어. 너도 적당히 하다가 다시 자라. 나는 잘 거예용."
침대에 몸을 던지는 꼴을 가만 바라보던 카르페는 고개를 저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부류의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생각하여서 한 선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자는 생각으로 테라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슬리퍼 없는 테라스의 바닥은 생각보다 차가워 저도 모르게 발을 움츠렸다. 저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우면, 또다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른다. 돈 좀 쓴다고 하더니, 오션뷰니 뭐니 하는 곳으로 예약했네. 자신 탓에 이런 곳에 더 있지 못하고 바로 가야하는 저기 저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자니 안타까움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고 조용했다. 고요함이 떠도는 공간에서는 간간히 찰박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꿈 속의 바다와는 다르게 지금 나의 바다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검을 들고 무언가를 베어나가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애초에 꿈의 한 장면과 현실을 비교하고 있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바다는 달을 머금은 채였다. 그것은 달의 따스함인가 서늘함인가, 카르페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정신머리. 습관적으로 난간에 쿵쿵 거리며 머리를 박아댔다. 그리하면 머리가 시원해지는 듯 싶기도 했다. 아닐 수도 있고.
아니, 아니. 정신이 더 나가버린 것 같기도 하고. 시야 속 바다의 끄트머리에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초록색의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내가 드디어 단단히 정신이 나갔나보다. 형, 내가 드디어 미친 것 같아. 카르페는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봤다. 흐릿한 머릿속에서 퍼즐이라도 맞추려는 듯이 찬찬히 집 나갔던 제정신을 짜맞추기 시작했다. 지금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고, 내가 지금 하려는 행동은 단단히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뭐겠어. 지금 당장 저 포근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이나 자는 거야. 그래, 알겠지. 하나, 둘, 하면 침대로 뛰어드는 거다. 하나, 둘⋯⋯.
그리고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젠장, 빌어먹을! 나는 미쳤어!
***
뛰쳐나가는 동안 많은 생각들을 이어나갔다. 하나, 이건 빌어먹을 꿈의 연장선이라는 예감이 든다는 거. 둘, 아무래도 내 정신이 단단히 미쳐있는 것 같다는 거. 셋, 그리고 저 정체 모를 사람이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며 뺨을 때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 와중에 급하게 신고 나온 신발이 하필 슬리퍼였던지라 뛰어가는 와중 신발이 몇 번이나 발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되는 일이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도. 그곳에 그 사람이 계속 서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면서 뛰는 것이, 헛고생을 할 미래가 벌써부터 보이는 게 한심해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가슴께가 답답해서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땅 바닥에 몸이 나뒹굴 것만 같았다.
슬리퍼가 다시 튕겨져 나간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마주한다. 슬리퍼를 다시 신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한 발자국 옮겨나간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대체 왜 요즘들어 이렇게나 정의할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 고개를 들이미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아니면 정말로 진작에 이미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것은 신기루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잘못 본 것도 아니었고. 그 사람은 그곳이 마치 자기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자리인 것마냥 그곳에 우뚝 서서는 바다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벙긋거리던 입이 다물렸다. 한참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거친 소리만 울려퍼졌다. 발걸음은 멈춘지 오래였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방은 자신이 온 것을 알아차릴까, 싶은 멍청한 생각만 들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목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헛기침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멈출 수도 없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튀어나왔다.
"⋯⋯롤로노아."
"내 이름을 알아?"
"정말 네 이름인 거냐⋯⋯."
카르페는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롤로노아. 몇 번이고 자신의 입 속에서 굴려대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저 얼굴에 끼워맞추자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퍼즐 조각마냥 쏙 들어가버리고 만다. 롤로노아 조로. 분명 단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도 친숙하고 익숙했다. 주저 앉은 카르페를 조로는 내려다봤다. 어디선가 저 짙은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저들의 침묵이고 약속인 것처럼. 두 사람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를 가르는 것은 파도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파도의 떠넘김 뿐이었다. 카르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회색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날선 눈동자, 도저히 친절한 얼굴이라고는 거짓으로도 말할 수 없을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페는 저 안에서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 얼굴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은⋯⋯
기쁨, 안도감, 친숙함, 익숙함.
그리고 그리움.
"⋯⋯뭐야, 너⋯⋯ 우냐?"
"⋯⋯⋯뭐?"
카르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눈을 소맷자락으로 비벼댔다. 묻어나오는 축축한 액체가 눈물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지금 울고 있나? 내가 지금 울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카르페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다는 점이었다. 졸업식에서도,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그토록 기다리던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도, 웃었으면 웃었지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알 수도 없는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 잘게 조각난 감정을 하늘로 떠올려보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뭐든 조각 내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베어내서는, 그냥 죄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감상이 떠올랐다.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그야말로 터져나오는 폭포수와 다름없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수로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역시 허구의 이야기는 아니었구나, 그건 죄다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구나. 그런 별 볼일 없는 감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제 모든 걸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고. 이제 나는 영락없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오열이나 해대는 이상한 남자'로 찍힐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이상한이 아니라 미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도 나는 차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차라리 지금 당장 저 깊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질까 하는 충동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맥주병이 바다에 빠져봤자 뭐할 건데, 싶어졌지만.
죽고 싶었다. 아니, 지금 당장 혀를 깨물까. 역시 그래야할까. 역시 지금 당장⋯⋯ 자신의 옆 언저리에 사람이 앉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면 그 자리에는 언제나 그랬듯 그 놈이 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우는 이상한 놈들이 있긴 하지."
"⋯무슨 소리냐, 그건."
"왠지 모르겠는데, 내 근처에도 그런 놈들이 좀 있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바다를 보면 그렇게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어. 바다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는 건지, 바다에서 누가 죽기라도 한 건지⋯ 오래 본 애들이니까, 그런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
"⋯⋯"
"너도 그런 놈들 중 하나겠지."
바다를 보고 우는 놈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우는 이유에는 물론 바다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내가 우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너일 것이 분명했다. 롤로노아 조로, 바로 네가 내가 우는 이유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구태어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아니, 내가 우는 이유는 너 때문이야"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 되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그럴 만한 이유도 사이도 아닌데. 굳이 저쪽에서 미치지 않은 인간으로 보일 기회를 준 마당에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카르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로는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나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하거든. 어째서인지, 바다를 항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물론, 내 꿈은 그런 거랑 거리가 머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바다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해. 왠지 모르게 말이야, 바다로 나가야만 하는 게 내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카르페는 함께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가 나를 부른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어느 누구는 그렇게 표현하기도 하더라고. 바다가 나를 부른다. 바다가 우리를 부른다. 뭐 그런 소리 있잖아. 쓸데없고 이상한 소리인데.
어째, 그 말이 틀린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카르페는 조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짧은 초록색의 머리, 회색의 눈동자, 살벌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웃어버릴 때면, 결국에는 어리구나 하는 감상을 내뱉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얼굴. 카르페는 이제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언젠가 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몇 번이고, 질릴 정도로 저 얼굴을 봐왔었다. 코 끝이 시려웠다. 제 얼굴은 분명 엉망진창일 것이 분명했지만, 딱히 눈물범벅인 얼굴을 닦으려는 의지가 생기지는 못했다. 물기어린 금안이 한 인영을 담아냈다.
"어쩌면 정말 바다가 널 찾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바다가 날? 웃기는 소리네."
"네가 네 입으로 말한 거잖냐⋯⋯"
조로는 피식 웃더니만 팔로 바닥을 지탱한 채 몸을 뒤쪽으로 뉘였다. 그러는 너는. 뭐? 바다를 보고 눈물이나 흘려댄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거. 카르페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철썩. 잠깐의 공백을 메우듯 파도 소리가 울렸다. 카르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바다가 우리를 부른 걸지도. 내뱉지 못한 뒷말은 바다가 삼켜버렸다.
"너는―"
"조로. 조로! 어디 간 거야!"
내뱉어지던 목소리를 끊고, 뒤늦게 목소리들이 울린다. 태평하게 대답하는 조로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카르페는 대략적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길을 잃은 건가? 아니, 쟤들이 길을 잃어버린 거지. 나는 똑바로 왔다고. 바다로 가자고 했는데, 난 도착까지 했잖아. 몸을 일으키는 조로의 허리춤에서 어쩐지 칼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바지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어내면, 제자리로 돌아가듯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하면, 카르페만 그 자리에 남겨지는 것이다. 카르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작별이다. 카르페는 생각한다. 주변의 소리가 뒤엉켜서는 뇌리를 다시금 뒤흔들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팔을 잡아세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탓에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상황 파악도 정리도, 심지어는 설명 조차도 못하는 주제에 책임지지도 못할 상황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에서부터, 이제는 돌아올 시간이었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이어지고, 멀어지면. 파도가, 바다가, 그 외로움을 달래듯이⋯⋯⋯.
"⋯그런데 우리, 어디서 봤던가?"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눈동자와 저도 모르게 마주친다. 자신도 모르게 저 뒷통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래서 나는 날 싫어해, 나를. 진짜로. 반복된 소리만 나열해대던 머릿통을 다시 한 번 꿰뚫는 것은 그 목소리였다.
"어째, 어딘가 익숙한데."
책임지지 못할 상황은 떼어내야만 했다. 어중간하게 이어질 것이라면야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어느 쪽이든 행복할 수 있을 방법이었다. 정의할 수 없을 관계를 정의하려다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을 카르페는 수없이 많이 봐왔다. 세상에는, 정의되지 않아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카르페는 그 중 하나가 감히 지금의 이 상황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런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아주 간단했다. 저 질문에 아니라 대답하면 쉽게 끝날 일이었다. 자, 하나, 둘, 그리고 셋을 하면 입을 열어서 짧고 쉬운 두 글자만 내뱉으면 되는 거다.
"어디선가 봤었지⋯⋯."
자, 그럼, 하나, 둘⋯⋯⋯
"아니, 봤었어."
⋯⋯그리고 난 저 카운트다운을 센 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끝나버린 후에 내가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도 알았다.
회색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별 것 없는 저 얼굴에, 저 눈빛에. 참⋯⋯ 우습지, 우습기도 하지. 한심한 꼬라지와는 다르게 입꼬리는 위로 쭉, 올라간다. 한심한 꼴일 것이 분명하다. 아니, 한심한 꼴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틀린 것은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 꼴이 더⋯⋯ 비슷할지도 모르지. 무엇과 비슷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이런 얼굴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그게 참 우리다운 거였으니까.
"―그래, 맞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바다는 까맣다. 허나, 어째서인지.
눈 부실 정도로 푸른 바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